ART & CULTURE

한선현 조각 - HANSUNHYUN SCULPTURE

Grandpassion 2016. 10. 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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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UNHYUN SCULPTURE

Pino와 친구들_나무에 채색_가변크기_2015

그리움_세콰이어_가변크기_2015

Zebra 얼룩세상_나무에 채색_142×206×36cm_2015

피노키오의 여행_멀바우 이로코 부빙가 니그늄바이터_211×175×440cm_2010

제페토할아버지와 피노키오_알마시카_280×110×450cm_2010

아트다트_시트카 스프러스에 채색_120×355×350cm_2015

나무조각가 한선현의 개인전이 고양시 덕은동에 위치한 목재소, 유림목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 『밝은마음 팩토리』는 유림목재의 창립 30주년 기념전시이자, 한선현-유림목재의 깊고 오랜 우정이 만들어 낸 특별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만여평에 달하는 목재소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박종식, 한만원, 강인구, 한선현 등 여러 작가들의 야외설치작품이 공개되고, '밝은마음 갤러리'로 구성된 '복합강당', 아트벙커가 설치될 '회덕골' 등이 포함된 유림목재 아트투어가 진행될 예정이다. 열한 번째 개인전으로 참여한 한선현은 이번 전시에서 야외와 실내를 오가며 탁월한 공간 해석을 보여주었다. 4미터가 넘는 커다란 이로코 피노키오부터 작은 목각 인형들, 그리고 드로잉까지 다양한 작업을 볼 수 있다.

'밝은마음'은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자 유림목재의 사훈(社訓)이다. 또한 이번 전시로 비로소 한 무대에 서게 된 유림목재와 나무조각가 한선현의 십여년 간의 우정을 지켜준 가치이기도 하다. 여기서 '밝은마음'은 순탄하고 긍정적인 상황이나 그 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단 차라리 봉착한 난관을 견뎌내고 헤쳐나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혼란이 가득한 시대에 '밝은마음'의 태도는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기업인의 삶, 그리고 예술가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전략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무대가 되는 나무 공장, 유림목재는 밝은마음 팩토리가 되어 전시 기간동안 '밝은마음'을 제조, 배포하는 상상이 실현되는 공간이 된다. 『밝은마음 팩토리』의 공장장은 한선현 작가이다. 서울에서 멀지않은 장소에서 숲과 작품이 어우러져 있는 거대한 목재소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 또한 관객에게 밝은 선물이 될 것이다.

한선현은 이번 전시에서 『밝은마음 팩토리』를 비롯해 목재소 야외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들을 공개한다.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건 유림목재 입구를 따라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는 염소 가족이다. 커다란 나무기둥 문을 넘어서면, 사훈 '밝은마음' 슬로건이 보이고, 진입로를 따라 450년된 시트카 스프러스나무 위에 그려진 얼룩말 다트, 「ARTDART」가 보인다. 아프리카, 남미, 북미,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해 온 원목을 건조, 숙성하는 야적장으로 가는 길엔 멀바우, 이로코, 부빙가 등으로 만든 4미터 가량의 목마와 그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유쾌한 피노키오, 「달리는 Pino키오」를 만날 수 있다. 유림목재 복합 강당을 채운 『밝은마음 팩토리』는 크게 세 공간으로 구성된다. 여러 나무조각 인간들을 태운 큼직한 증기기관차와 자그마한 나무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 그리고 나무 조각들에 갇혀있는 공주와 그를 지키는 소년이 살고 있는 성이다. 한선현은 이전의 전시들에서 염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시를 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위와 같은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더욱 풍성한 이야기 페이지를 더했다. 이탈리아 북서부의 까라라국립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 고향 당진으로 돌아가 작업하던 한선현이 고양시 덕은동 작업실에 자리를 잡은 건 2003년이다. 이후 오랜 시간 꾸준히 유림목재와 왕래하면서 유림과 함께 그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목재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2010 - 염소의 꿈 . 만들다 

잘 건너자!_멀바우_55×48×10cm_2008

염소_멀바우_41×55×10cm_2008

휘익~휘익_멀바우_40×62×10cm_2008

자유_멀바우_33×36×10cm_2008

프로당구_멀바우_33×59×10cm_2008

무서워!_멀바우_29×38×10cm_2008

현대의 작가들은 특정한 사회, 즉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생활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작가들은 타자와의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이 경우 현대작가란 특정한 사회적 구성체의 일부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현대작가들이 환상적이거나 주관적인 자유만을 탐하지 않는 한, 이들의 창조적 자유는 우리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나 다른 실재물과 무관하게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예술의 사회성과 역사성의 결과를 인간 조건의 자연적인 특질로 이해하였다. 즉, 역사적인 힘과 이해의 결과를 통한 경험을 통해 다른 시대를 경험하고, 그 시대가 현재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바가 있으므로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창조적 자유란 사회 속에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회를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예술의 이러한 특수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잠재되어왔던 것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보인다.

목木 조각가 한선현도 역사로부터 그리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현대 조각을 공부하러 이태리에 갈 때 까지는 의기양양해져서 갔겠지만 그곳에서 그는 거대한 역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새로움 만이 현대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바르트적 사고에 눈을 뜬 것이다. 몇 년 동안 천착해온 석 조각을 일거에 내 던진 그가 손에 잡은 것은 다름 아닌 나무였다. 학창시절 우리가 그토록 진부하다고 느꼈던 나무를 품에 안고서 돌아왔다. 또한 진부하되 진부한 전통적 장르인 부조 relief 浮彫를 덤으로 가져왔다. 부조란 평평하게 표현된다는 점에서 회화에 가까운 조각의 일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회화가 가지고 있는 전통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답습 한다. 부조는 환조와는 달리 어딘가에 부착하기 위해서 제작되어 왔으며, 그 목적이나 용도에 따라서 적합한 여러 양식이 발달되어 왔지만 모더니즘의 편협성에 밀려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들어 진 것이 사실이다. 한선현의 부조는 멀게는 조각의 상像과 면面과 배경이 되는 면의 2중면으로서 추상적인 조각면의 깊이를 표현한 그리스 전통을 따르며, 가깝게는 입체파들의 꼴라주의 기술적인 기법도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선현의 부조는 하우트릴리프haut-relief의 방법으로 제작된다. 흙 부조는 테크니컬한 기교를 부릴 수 있는 반면 견고한 재료인 나무는 다루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방법이고 高 부조이다. 또한 질박한 내용의 표현상 고부조가 적절한 선택으로도 보여 진다.

한선현은 1993년 「인간」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시작하여, 2000년 이태리에서의 전시 주제인 『동물』展을 시작으로 기나긴 동물과 인간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02년 「인간과 동물」展을 귀국전으로 열었고, 2003년 「한선현의 작은 작업실」에서는 그만의 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일반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2005년 「외다리 위의 염소」에서는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염소라는 희화된 동물을 통하여 위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2006년에는 「흰 염소의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여 전쟁터에 나타나 동분서주하는 염소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일곱 번째 개인전으로 그가 조각을 하며 짬짬이 그려온 그림일기「염소의 꿈- 그리다」 300여점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선현이 바라보는 대상은 왜곡되고 불편해진 우리의 현실적 모습이다. 하지만 작가는 부조리한 사회의 이미지를 더 이상 응시의 대상으로 놓기를 거부하고, 응시의 주체로서 의인화되고 각색되어진 염소의 이미지를 대상화 하였다. 즉, 작가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타협점이 염소라는 주인공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자와의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낯선 대상에의 집착에서 드디어 자유로워진다.

한선현은 유년시절부터 꿈꾸어온 계획들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실현시키는 완벽주의자이다. 또한 그의 작품 안에서는 잘 훈련된 능수능란한 조련사이면서, 히틀러식 전제주의가 연상되리만치 정확하고 절도 있게 등장인물들을 통치하는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다소 어리숙한 염소는 표면상으로는 좌충우돌 하는 캐릭터로 비추어 지지만, 집을 떠나 세상을 알아가는 염소의 모습에서 선재동자의 깊고 고요한 화엄경의 세계가 읽혀지는 듯하다.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단연히 여겨왔던 많은 것들을 부정하거나 탈 정신화 시키는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세상은 후기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오랜 세월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었던 희망, 사랑, 추억, 친구, 동화, 동물... 한선현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중심에 작가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치시킴으로서 보다 교묘하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꿈꾸고 희망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 한선현은 목향木香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 몇 년 전 부터는 몇 만평이나 되는 목재소에 아예 들어가서 작업하는 목재 부자 작가이다. 나무는 그의 심성이 나무를 닮은 사람한테만 그 큰 품을 내어준다. 한선현은 조각도를 통하여 대상을 조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숨겨져 있던 이미지들을 찾아가는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한선현의 그림들은 거짓 없이 착하고 진솔해 보인다. ■ 이종호

 2009 - 염소의 꿈 _ 그리다 

open_종이에 크레파스_2008

꽃물주기_종이에 크레파스_2004

야아~_종이에 크레파스_2007

행진_종이에 크레파스_2009

모두안녕_종이에 크레파스_2004

꽃을 문 염소_종이에 크레파스_2009

붉은염소_종이에 크레파스_2006

염소의 꿈 -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 하다 ●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대상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길고도 험난하다. 물론 세상사 모두 힘들고 녹녹한 일이 있으랴마는 창작을 업으로 하는 작가의 고뇌는 더욱더 고단해 보인다. "그냥 염소가 좋아요. 외나무를 잘 타는 것도 신기하지만 매일 같은 소리로만 매에~ 하고 울잖아요. 독초만 빼고 모든 풀을 안 가리고 먹는 것도 맘에 들지만 그 특유의 딱딱한 굽으로 높은 곳에 잘 올라가는 것도 제 작업의 주인공으로 염소를 캐스팅한 이유입니다..." 한선현은 그저 평범하고 『동물의 왕국』에서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염소에게 그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주인공으로 모시기에는 아무런 화려함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지못하고 수염까지 우숩게 난 염소를 데뷔시키느라 고생한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다년간 한선현은 이태리 유학시절 습득한 목木조각을 통하여 장인의 테크닉에 가까운 목 부조를 선보여 왔다. 다분히 의인화된 염소는 그의 작업 『전쟁과 평화』, 『인간과 동물』, 『외다리위의 염소』등의 전시에서 다양한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내고 있다. 한선현의 작품은 외나무다리에 서있는 그의 염소마냥 한없이 외롭고 고독한 작업이다. 그는 세상의 밖에 서서 세상의 중심에 화살을 던지는 확실한 아웃사이더면서 국외자局外者를 자처하지만, 그의 염소는 두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초인적超人的인 존재로 보인다. 때로는 전쟁터의 병사로 분장하는가 하면 어느 때는 외길위의 힘없는 일상, 고독, 노동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또는 곡예사, 지휘자 등으로 변신을 시도해 세상의 어려운 분쟁을 해결하는 해결사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얼룩 뱀의 꾐에 넘어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잘 차려진 식사를 하고나오는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는가하면 고급술에 취해 방탕해 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한선현의 그림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해 보인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동그란 풍경이 그림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림을 그릴수록 잘 그리게 될까봐 겁이 난다는 그의 이야기처럼 한선현의 그림은 아동화의 구조적 메카니즘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다만 한선현은 지각의 대상으로서 '시각적 형태'에 좀 더 접근해 있는 듯하다. 요컨대, 미적 구조란 자연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미적 질서인 것이다. 따라서 아동화의 구조는 작가의 바깥쪽에, 그리고 지각 형태는 작가의 안쪽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선현은 보는 것과 표현하는 것의 두 가지 조형방식을 모두 이야기 하고 있다.

한선현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온갖 유머와 위트가 넘쳐나는가 하면 예리한 메스를 겁 없이 들이대 동시대 인간들의 우매함을 꼬집기도 한다. 해학이 대상의 공격 없이 웃음을 던져주는 경우이고, 풍자가 대상의 공격성을 포함한다고 본다면 분명 한선현의 작업들은 풍자에 가깝다. 단순히 웃고 넘기기에는 전달하는 메시지가 강해 보인다. 끊임없이 부지런하고 변신을 시도하는 염소를 통하여, 한순간 유보하면 잃고 마는 인생이 될 것 같아서 도저히 체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듯하여 결국 쓸쓸해지고 만다. 하지만 한선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희망의 시작은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그래서 결국 행복해 지는 대 반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투박한 목 조각으로 단련된 그의 손끝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그의 조각만큼이나 따뜻하고 정겨워 보인다. 대리석 조각의 메카인 이태리 까라라에서 나무 조각을 공부하고 돌아온 특이한 그의 이력만큼이나 한선현은 다양한 재능을 보이는 조각가이다. 아동서의 삽화를 그려 동화작가의 능력을 보이는가하면 이번에는 수 백 장의 드로잉 작업을 선보인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염소의 활약으로 대변되는 한선현의 염소일기는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세상, 그리고 리얼리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진정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 이종호


 2006 - 흰염소의 전쟁 . 그리고 평화 

VACANZA_나무_92×126×13cm_2005

지구는 둥글다_나무_지름 48cm_2005

신문보기_나무_25×30×10cm_2005

총과대포를 쏴대는 교양없는 염소들_나무_73×100×13cm_2005

탱크-매달리기_나무_38×48×10cm_2005

결투_나무_40×45×10cm_2005

우리는간다_나무_52×38×10cm_2005

익살맞은 상상은 진정한 해학에 도달할 것인가? ● "요새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이 만화 아닌가요?" 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중견작가의 푸념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류의 작품들이나 표현방식에 있어서 이미 순수미술의 영역 안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만화의 기법들이 혼성된 미술계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일축해 버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화이건 일기이건 일간지 가십거리처럼 내뱉어 버리면 그만인 듯 미술 작품들 속에는 현실에 대한 비꼼과 가벼운 장난질 같은 것이 난무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조금 더 나아가면 비꼬는 주체가 되는 미술 스스로를 비꼬는 '이중의 허탈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도 만나게 된다. 삶과 인간과 미술을 어떤 커다란 가치의 대상으로 숭배할 필요 없다는 생각들. 잔뜩 부풀어 오른 허풍과 허위를 풍선에 바람 빼듯이 짓밟아버리고픈 충동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생각의 가닥을 잡아 위안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오시 마모루의 '이노센스')에 나왔던 대사, '이해는 바람에 근거 한다'를 떠올리며 생각해보게 된다. 작품 고유의 힘은 간데없고 어떤 희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의미를 읽어내려는 관객의 애달픈 바람만 남는 것 같다.

한선현의 작품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염소를 주인공으로 한 은유법이 그렇다. 단순하면서도 맛깔스럽게 목재를 요리한 작가의 솜씨 또한 그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에서 염소는 인간의 삶을 산다. 신문을 읽고 술을 마시고 전쟁도 한다.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염소는 그 단순한 장면 하나로 많은 의미를 유추하도록 이끈다. 아슬아슬한 삶. 상대방을 만나면 싸워 이겨야만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는 삶. 외로운 삶 등 등.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염소는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지혜롭기보다 약삭빠르기만 한 것 같기도 하며 때론 귀엽고 때론 멍청해 보인다. 통합되는 정서는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과 따뜻함이다.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서가 묻어있는 부분이다.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작품들임에도 하나하나의 작품은 서로간의 개연성에 있어 느슨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유일한 분단 상황인 한반도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받아들이기 싫더라도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주제는 인간의 삶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있는 것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 사랑과 분노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한선현이 작품을 통해 내세우고 있는 주제는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안타깝게도 피상적인 접근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관찰한 삶의 표정들이 그렇고 전쟁의 표상들이 그렇다. 어렵게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 미술의 소재가 되는 삶의 속내들이지만 그 접근의 깊이는 작가 스스로 충분히 숙성시켜야하고 때로는 절실할 정도의 진지함이 요구된다. 한선현의 작품에 일상의 순간 포착과 폭력과 슬픔 또는 아이러니가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동과 숙연함 보다는 가벼운 웃음과 동의에 그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 출발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한선현의 작품이 가진 특성과 관련하여 가능성을 내다보고 싶다. 그가 다루는 목재라는 매질은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장인적인 손길을 요구하는 까닭에 많은 작가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조각가 한선현'임을 내세우는 그에게 노련한 장인의 손맛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긍정적인 시선과 위트를 동반한 상상력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장점임에 틀림이 없다. 모순과 부조리함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이 인간 삶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전제한다면 부정적인 빈정거림이나 체념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삶에 대한 해석과 반응에는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 그 중에서 조각가 한선현에게는 그만이 풀어갈 수 있는 숙제를 떠넘기고 싶어진다. 호쾌하고 진지한 유머. 진실한 의미의 해학을 품은 작업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다. 해학은 따뜻함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예술적인 가치이다. 삶과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동반되어질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며 거대한 주제에서 내려와서 자기 자신의 밑바닥으로부터 출발하는 세심한 시선은 또 다시 인간 총체를 다룰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이것은 그가 만들어 낸 한 조각의 해학으로 말미암아 삶을 대하는 따스하면서도 냉철한 도전을 얻어가고픈 마음을 실은 부탁과도 같다. ■ 신혜영


 2002 - 유희 또는 통념에 대한 유쾌한 반란 

얼룩말의 엉덩이_IROKO_ø60×8cm_2002

거미_IROKO_ø60×8cm_2002

으악어_IROKO_ø60×8cm_2002

느윽대_IROKO_ø60×8cm_2002

노새_MARBLE_45×40×69cm_1998

돌고_GRANITO_52×38×46cm_1998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_MARBLE_37×47×68_1998

한선현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마치 다트게임을 하듯 자신의 작품을 향해 화살을 던지게 하였다. 나무부조인 작품에는 당연히 놀이의 흔적인 상처가 남아있다. 비록 관람객들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 속에 표현된 동물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보존'되어야 할 작품을 향해 화살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쾌감을 느낀다. 가까이 다가서서도 만져서도 안될 예술작품을 향해 한정적으로 허락된 '살해행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는 이 기막힌 역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내재해 있다. ● 첫째, 오로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해 제작된 작품만이 관람객과 상호작용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재료기법을 활용하고 수공의 공정을 거친 작품 또한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따라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방부처리되고, 박제되며 영원불멸하는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사람들을 수동적 관람자가 아닌 놀이의 참여자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과녁 속에 표시된 부위를 맞춘 사람들에게 그가 제작한 상품을 나눠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그는 관조적이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분위기조차 풍기는 전시행위를 하나의 오락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전시에 대해 우리가 지닌 믿음을 위반한다.

물론 한 예술가의 지적, 물질적 노력의 산물인 작품은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은 장 팅겔리(Jean Tingeuly)의 자기파멸적인 「뉴욕에 바치는 경의」나 혹은 주변환경의 변화에 따라 형태의 변형이 일어나는 요셉 보이스(Joshep Beuys)의 「비계덩어리」 등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고 많은 설치작품 또한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선현의 작품을 새삼스러운 것으로 여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차원은 분명히 다르다. 스스로 파괴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이나 사람의 접촉이 아닌 온도의 변화에 따라 변형이 일어나는 작품과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차원은 분명히 다르다. 과녁에 관한 한 무엇보다 먼저 미국 네오 다다의 한 사람인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네 개의 얼굴과 표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기성품처럼 애매모호함과 역설을 그 특징으로 한다. 존스의 과녁은 화살의 침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완결적 작품으로 현존한다. 그러나 한선현의 작품은 비록 제한된 사람에게만 화살을 던지도록 허락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과녁을 명중시키고 부상으로 선물을 받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일부이다. 당연히 화살을 던지기 위해서는 작가가 정해놓은 적은 액수의 참가비를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선현의 과녁은 존스의 작품이 지닌 애매모호함과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미술의 무거움에 대한 유쾌한 도발, 그러나 그 작은 모반은 또 하나의 의미를 향해 열려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그의 과녁은 일종의 이미지로 표현된 덫이다. 인류의 조상들에게 동물사냥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오늘날, 사육된 동물은 더 이상 사냥의 대상이 아닌 '재배'된 먹이이다. 사냥이 스포츠나 레저가 됨으로써 동물은 인간의 생명보존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지점, 그의 작품은 동물사냥의 쾌락을 누리고 있는 인간의 잔혹함 속으로 파고든다. ● 우화적인 그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을 염소로 비유하고 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마리의 염소는 이솝우화와 같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는 그것을 통해 사소한 것에도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목숨을 거는 현대인들의 피폐한 마음을 풍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염소를 통해 자전적 이야기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탈리아 유학시절 당한 교통사고를 그는 자동차 앞에 쓰러져 있는 한 마리 나약한 염소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구름을 낚고 있는 한가롭고 목가적인 염소로부터, 염소박사, 선탠하는 염소, 술 취한 염소 등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동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주목해 볼 때, 그가 사냥의 형식을 빌어 작품을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놀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동참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우화적인 작품을 동시에 봄으로써 동물은 사냥이나 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아끼는 것처럼 보호하여야 할 생명체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얼룩말과 동일시된 작가 자신의 모습을 통해 거듭 확인된다. 부조로 표현된 얼룩말과 환조의 인간은 같은 무늬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대상이 된다. 얼룩말에게 있어서 얼룩무늬는 자기보존을 위한 일종의 위장이자 또한 다른 성의 동물을 유혹하기 위한 장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에게 얼룩무늬의 옷을 입혀놓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때,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녔을 얼룩말은 이제 특정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가련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인간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인 얼룩말은 고향을 상실한 뿌리뽑힌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징한다. 마치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나 입을 법한 옷,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결박하고 있는 옷을 입은 인간은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얼룩말의 운명과 별반 바를 바 없다. 비약컨대, 얼룩무늬 신사 또한 겉으로 드러난 패셔너블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영락없이 죄수를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그렇다면 얼룩말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설득력을 지닌다면 동물사냥은 결국 인간사냥과 동일시된다. 우리가 과녁을 향해 조준하여 화살을 던지는 순간 그 화살은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우화가 지닌 비상한 진실, 한선현은 그것을 빌어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이미지의 덫이란 바로 우리를 그가 의도한 세계 속으로 참여하도록 유혹하는 미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미끼에 걸려들지 않도록 걸어놓은 경고이기도 하다. 그는 폭력의 참혹함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을 잔혹한 방식이 아닌 해학과 풍자의 언어로 풀어감으로써 우리 스스로 일종의 정신의 해방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이야기로서의 조각이 지닌 넉넉함이라고 할까. 어떤 점에서 진부해질 수도 있는 일상적이면서 소박한 내용 속에 깃들인 평화와 공존에의 요청, 그의 작품은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이 아니라 존재의 고귀함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상호존중의 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그가 유희로서의 사냥의 방식을 빌어 그것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한 평화주의자의 소박한 의견개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최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