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CK 기본 STUDY

벤저민 그레이엄의 인덱스 펀드

Grandpassion 2017. 2. 2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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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그레이엄 Benjamin Graham 1894년 5월 9일 ~ 1976년 9월 21일

증권분석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며 가치투자 이론을 만든 인물이다. 

제자로 월터 슐로스와 워렌 버핏이 있는데 버핏은 그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를 읽고 격찬하여, 저자에게 갈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현명한 투자자. 증권분석.


1894년 영국 런던에서 사업가 아버지 아이작 그로스 바움과 어머니 도라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의 확장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의 사업 수단이 뛰어났고 영국에 남은 가족들의 사업은 쇠퇴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일찍 사망해 집안이 심한 위기를 맞았으나 어머니 도라의 강한 생활력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그레이엄 본인은 어머니의 허영심이 강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재밌는 것이 아래에 서술된 첫 와이프의 경우는 원래 친형과 호감을 나누던 사이였는데 벤저민 그레이엄이 반하여 가까워졌었고, 엄청난 매력을 내뿜는 연인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서술하였으나 관련된 사진에서 확인되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나이가 들었던 때긴 하지만 그의 서술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외모였다. 



학창 시절


학창 시절 월반을 할 정도로 수재로 인정받았으나 승부욕이 강했다. 테니스도 유달리 잘했다. 또한 언어에 흥미가 있어 각종 언어를 독학하였다. 뉴욕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본인은 만족하지 못한 듯, 자퇴하고 1년을 전화 조립 회사에서 일한다. 그레이엄 본인은 이 시기에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회고한다. 콜롬비아 대학 총장의 부름을 받고 장학금을 돌려받고 대학을 다시 다닌다.



직장


처음엔 세일즈로 시작했으나 별다른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이미 온갖 일은 다해 본다. 그는 회고록에서 직장에서 무능한 직원이 부모를 잘 만나 승승장구하고 성실하고 유능한 이가 망하는 걸 보고 세상 일은 알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 결국엔 직장에서 큰돈을 받게 되는데 나중엔 아예 지금으로 치면 사모펀드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면서 감히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건드려 결국 그 회사의 자본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배분하도록 만든다.



투자


처음엔 친한 교수의 자금을 맡아서 모두 날리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는 오르기 쉬운 우선주엔 매수, 떨어지기 쉬운 보통주엔 공매도를 걸었는데(동시에 한 종목에 이런 두 가지 방식을 적용하는 기법을 써서 안정장치를 마련한 듯하다), 이러한 방식을 현재 제도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 당시는 법도 허술하여 돈을 벌 틈이 많았는데 벤저민 그레이엄에게 그 틈들은 바닥에 널린 금화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그레이엄의 당시의 시대는 도움이 됐다. 가난한 성장환경 탓에 투기적 성향은 적었다. 워렌 버핏뿐만 아니라 벤저민 그레이엄도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어서 대공황 때에는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많은 돈을 잃었고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부터의 경제부양 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뭔가 록펠러와 성공과 쇠락의 타이밍이 반비례하는 것 같다.



극작가 경력


문학은 거의 자기 돈을 내고 했다. 극작가로 할리우드에 야심 찬 도전을 했으나 망신만 당한다. 인생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문학에 두려한 것 같으나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별세하기 몇 년 전쯤 모든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장대하게 자신이 창작한 소녀감성의 시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저작물


워렌 버핏이 극찬한 현명한 투자자 The Intelligent Investor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증권 분석 Security Analysis)이 있다. 


현명한 투자자에는 주로 기술적 내용보다는 투자 가치관 등이 담겨 있으며 증권 분석에는 보다 세분화되었지만, 채권 선택 방식 등 역시 전반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현명한 투자자의 내용은 가치 평가를 하라, 저평가주를 사라, 손절매뿐 아니라 이득에 대해서도 안전 마진을 정하고 과욕을 금하라 등 투기를 하지 말고 투자를 하라는 내용이다. 증권 분석에서 또한 채권 


구입 요령은 얼마나 좋은지가 아니라 얼마나 결함이 없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가르침의 궤가 되는 내용은 신중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러한 방식의 장기 투자가 어렵고, 요즘은 그때와 달리 공매도가 없다.



말년


상품 준비 통화 계획을 창안했고 이를 미국 정책에 반영하려 노력했다. 바루크 형제 중 유명했던 형 바루크가 매우 경멸했으나 동생인 허만 바루크와는 관계를 유지해 그를 통해 루즈벨트에게 정책 반영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그레이엄은 유대인이었으나, 기존의 유대인 집단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록펠러와의 인연


그레이엄이 본격적으로 성공 궤도를 달리게 된 계기가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의 자회사의 잉여 자본을 모든 투자자에게 공평하게 배분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가장 큰 혜택을 보았다. 그 과정이 가히 전쟁에 가까웠는데 대인배 록펠러는 그레이엄의 행동을 용인해주었고 결국 그의 뜻대로 되었다. 혈기왕성했던 그레이엄과 그의 동료들은 록펠러가 우연히 같은 음식점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의견을 말하고 허락을 구할까 충동적인 생각도 했었다. 


결국 대기업의 오너급인 록펠러의 명령에 못 이겨 스탠더드 오일 자회사의 경영진들은 이를 갈며 억지로 자본을 배분토록 하는 서명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경제협회에서 그레이엄 혼자 다른 회원들의 집단적인 의견을 반발하며 발표를 한 일이 있었는데 록펠러가 유일하게 그 의견에 찬성을 했었고 그레이엄은 회고록에서 록펠러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글들을 남긴다. 록펠러는 좋은 사람.



워렌 버핏과의 인연


그레이엄의 말년 즈음 워렌 버핏은 그레이엄의 콜롬비아 대학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레이엄이 버핏을 총애했다기보다는 버핏이 애제자를 자청하고 나선 격에 가깝고, 그레이엄은 성격상 한 명의 제자를 기르는 등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늙어서도 연인과 러브 레터를 보내고 개인적인 사색과 집필을 즐기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었다. 조금 더 서술하자면 그레이엄은 '안전 마진'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수익조차도 너무 많이 내면 안 된다고 한 반면, 버핏은 밑도 끝도 없이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버핏이 그레이엄을 가치 투자의 원조격으로 내세웠지만 그레이엄은 '가치 투자'란 말을 강조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또 버핏 본인도 부자가 된 계기는 그러한 장기 투자 방식이 아닌 부분에서 '장기 투자'를 강조하는 것이 본인의 회사에 장기 투자하라는 것인지, 정말 자신의 투자관을 설명한 것인지 진정성에서 영 의심스럽다. 버핏이 그레이엄의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과대평가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레이엄은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고 유대인답게 조용한 사람이다. 그레이엄이 처음에 자기 회사에 들어오겠다는 버핏을 거부한 걸 볼 수 있듯이, 버핏의 경제 활동, 즉 자선 사업가처럼 행세하며 절약을 주장하고 어떤 제스처를 취하기 좋아하는 버핏의 성향 자체를 외향적으로 판단하고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 관계


원래 가족 사업을 하는 집안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후, 영국에 남겨진 원래의 친척들은 약간 가세가 기울었다. 조부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강도를 당했고, 그에 대한 심리적 충격으로 얼마 가지 않아 사망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서술한다. 아버지는 유능한 사업가였으나 벤저민이 어렸을 때에 일찍이 사망한다. 위로는 두 명의 형이 있는데 벤저민의 청년기에 형들의 레코드 가게 창업을 도와준 적도 있으나 형들의 사업수완이 별로 좋지 않아 망했고, 그 후로도 벤저민 외에 가족 내에 별다른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런 부모의 경제난과 궁핍한 형편 때문에 눈치를 보며 친척집에 얹혀 사는가 하면 농장에 일을 하러 가기도 하고 성격에 맞지 않는 외판원 일을 하면서 좌절을 겪는 등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보호해줄 존재가 없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이 되고 부자가 된 이후에도 소비 습관과 인생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여자관계는 별 실속이 없었다. 버핏에 의하면 생긴 것도 볼품없는데 첫 결혼은 기가 굉장히 센 여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그 뒤로도 두 번의 이혼을 했다. 어머니의 냉소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자녀로 아이작 뉴턴, 마저리, 일레인, 뉴턴, 벤저민 주니어를 두었다. 첫째였고 자신을 빼닮은 아이 같지 않은 영특함을 보인 아이가 급사한 후 둘째를 낳아 같은 이름을 붙였으나 그 아이도 한국전 참전 후 자살한다. 셋째 아들은 의학박사가 된다. 두 딸은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즐겁도록 여러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딸의 교육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한 번은 딸이 음란 서적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격분하여 그 책을 내던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강박 관념을 허물고 딸이 읽던 음란 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사고관을 고치는 재미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서술하였다. 본인은 유대인으로서의 성향을 부정하면서도 왠지 같은 유대인인 프로이트가 연상된다.


워렌 버핏이 투자를 할 당시에도 미국 기업의 주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순조롭게 상승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겪은 대공황 등을 워렌 버핏은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겪지 않았다.

출처 - 나무위키



벤저민 그레이엄 - "인덱스 펀드"


그레이엄은 오늘날의 증권 분석, 기업 분석의 모든 틀을 거의 혼자서 다 구축해냈습니다. 고학으로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영어, 철학 등 여러 곳의 교수 제의를 다 뿌리치고 월가의 허드레 일하는 직원으로 취직, 결국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월가에서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투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자민 그레이엄의 명언으로는 독자적 판단이 가능할 때 투자해라, 안전마진이 확보된 곳에만 투자한다, 앞으로 2등이 될 10등 주식을 산다, 감정을 다스리고 이성으로 판단한다, 투자 실패에서 배운다 등이 있습니다.

 

그레이엄은 투자와 투기에 대한 정의를 내렸는데요, 투자란 철저한 분석, 원금의 안정성, 기대수익이 동시에 이뤄지는 행위를 

말하며 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는 투기라고 말했습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재미있는 투자 명언을 몇 가지 더 살펴보면 '식 거래는 아내를 선택하는 일과 비슷하다. 많은 구체적 사항들이 어느 정도 세심하게 검토되고 그런 다음 거기에 비합리적인 편애라는 강력하고 지배적인 요소가 더해진다, 절대로 투기용 자금과 투자용 자금을 한 계좌에 마구 섞어 운용해서는 안 되고 매매 자체고 구분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벤자민 그레이엄은 투자와 투기를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투기 자금과 투자자금은 나눠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워렌버핏은 자신의 투자철학을 묻는 질문에 항상 이렇게 답을 하는데요, 그 이유는 투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안전마진"의 개념을 그레이엄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필립 피셔는 위대한 기업을 수십 년 보유한다면 지금 당장의 높은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그레이엄은 오직 숫자로만 기업을 판단했기 때문에 가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레이엄은 경영자나 브랜드, 진입장벽 같은 무형의 자산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다른 스승의 투자방법을 워렌버핏은 "위대한 기업을 싼 가격에 사는 전략"으로 만들어 냅니다.



안전마진이란 무엇인가?


안전마진, 가치투자전략의 핵심으로는 먼저 안전마진은 한 기업의 이자비용 뺀 뒤 남은 영업이익이 소진될 때까지의 비율인데 파산했을 때의 자산가치와 현재 시가총액과 비교해 보더라도 안전마진 클수록 손실보다 이익을 볼 확률이 높았습니다. 

결국 지속적인 수익을 내면서 재무상황도 건전하고 기업을 싸게 사는 방법이 투자의 핵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어떻게 투자했나?


기업 규모가 크면 클수록 좋다고 했고 이것은 워렌버핏 방법과 똑같습니다. 재무구조나 배당성향 등을 철저히 밝혔습니다. 최근에 증권가에서 보면 1분기 이익이 좋아졌다나 2분기 이익이 좋아졌다고 따지는데 벤저민 그레이엄은 최소 10년 정도의 추세 이익을 좋아했습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기업, 20년 이상 배당을 지속한 기업을 좋아했습니다. 이런 케이스의 종목 중에 주가가 폭락하는 종목을 좋아했습니다. 한 예로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19년 동안 단 한 번의 적자를 내지 않은 기업, 현대모비스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보면 재무상태나 배당 기록을 보면 과거 5~10년 최소 기준은 10년을 잡는데 유동자산이 150불 이상 그리고 부채가 110불 이하인 기업들을 좋아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번 필립 피셔의 경우 숫자도 중요하지만 CEO의 능력이나 진입장벽 등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벤저민 그레이엄은 그런 것들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다 필요 없고 숫자가 가장 좋은 종목 이러한 종목을 좋게 봤습니다.



그레이엄 방식으로 이렇게 투자를 하면 전부 성공하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반 투자자의 경우 벤저민 그레이엄 투자 방식을 선호하다 보니까 몇 개의 소수종목을 싸서 담아 놓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벤저민 그레이엄 투자 방식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벤저민 그레이엄도 인식을 했기 때문에 모든 주식을 담는 인덱스 펀드처럼 운용했습니다. 소수의 싼 주식을 담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종목을 담아서 이끌고 간 것입니다. 개인투자자들이 이런 것을 오해하다 보니까 싼 주식들을 가지고 있는데 몇 년이 지나도 그 자리인 종목이 있습니다. 


분산투자하는 것이 벤저민 그레이엄 방식의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데요. 저평가된 주식을 사면 언젠가는 오른다? 이 부분에 대해서 벤저민 그레이엄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수 백개의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그런 점에서 그레이엄 투자 방식은 인덱스 펀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떤 주식이 오를지 모르기 때문에 다 담는 전략을 사용한 듯합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주식시장을 '미스터 마켓'이라고 표현한 것도 봤는데 무슨 내용인가?


매일 우리에게 주식 가격을 알려주는 친절한 아저씨로 표현했는데 1만 원짜리 주식을 2만 원에 사라고 달려오는데 똑같은 상황임에도 기분이 너무 나빠서 1만 원짜리 주식을 터무니없이 1000원에 제시하는 사람, 즉 주식시장을 미스터 마켓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를 잘 이용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하는데 보통 일반 투자자들은 '미스터 마켓'에 잘 속기 때문에 돈을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만 소개해 준다면?


벤저민 그레이엄의 경우 아내가 많았는데 그런 아내를 파티장에 다 데리고 다녔던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교수 시절 유일하게 A+ 준 학생이 워렌버핏이었습니다. 그런 워렌버핏이 무급으로 일하겠다고 일자리를 달라고 했는데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엉뚱한 사람이었는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가다가 다른 사람이 지적을 했을 때 우리 집에 똑같은 신발이 한 켤레 더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도 했습니다. 


주식투자를 마지막에 그만두었는데 돈 버는 것이 재미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의 거장 투자자들을 모두 길러 낸 위대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사람이기도 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투자자입니다.


출처 - SBS CNBC 나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