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CK 기본 STUDY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Grandpassion 2017. 2. 25. 23:11
반응형

손정의 손 마사요시 孫正義 Masayoshi Son 1957년 8월 11일 일본 사가현 토스시. 국적 일본

본관 일직 손씨

본적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학력 UC Berkeley 경제학과 학사

재산 2조4200억엔, 한화 약 25조5천억


기업인. 소프트뱅크 그룹의 창업자로서 소프트뱅크 그룹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소프트뱅크 주식회사 대표 집행역 사장 겸 CEO,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오너 등을 맡고 있다. 참고로 겅호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 겸 아시안 그루브 주식회사 대표이사이자 사장인 손태장이 손정의의 막냇동생이다.


신조


인생 50년 계획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 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 마사요시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인생 50년 계획"은 그가 19세가 되던 해에 세운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50대까지 그의 인생이 그가 세운 인생 계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6년 7월 현역 은퇴를 철회하고 10년은 더 하고 싶다고(인공지능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가져오기 때문) 소프트뱅크 주주총회 직전 날에 밝혔고 후임을 퇴임시켰다. 원래는 60세 생일에 깜짝 은퇴 발표를 계획했었다.



생애


한국계 일본인 사업가로 재일교포 3세이다. 손 회장의 아버지 손삼헌(78) 씨는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128번지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손종경(1899~1968년)씨는 벼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1930년대 일본군이 비행장을 만들면서 농사 지을 토지를 잃었다. 


그래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돈벌이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는데, 광복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려워 1년가량 머물다 다시 일본으로 가 규슈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광산 노동자로 일했고, 할머니는 리어카에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 가축사료로 쓰곤 했는데,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밖에 나가 일하시느라 잘 볼 수 없었고,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를 타고 놀면서 자랐다. 손 마사요시는 그러한 할머니의 고생 이야기를 하며 공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손 마사요시 일가가 재산을 불린 것은 그의 아버지 대에서였다. 손 마사요시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소액 대출업을 했고, 파칭코 사업으로 재산을 불렸다. 부친은 사업 감각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한 예로 파칭코 주차장에 유료 낚시터를 만들어 "붉은 잉어를 낚으면 보너스 만엔"이라며 호객을 했는데, 파칭코로 잃은 손님은 낚시에서 돈을 따려했고 보너스를 딴 손님은 다시 파칭코로 갔다.


하지만 그가 10 대일 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며 병원에 입원하자, 그는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 꿈은 교사, 화가, 정치인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직업이기에 상대적으로 차별이 덜한 사업가를 선택했다. 여담으로 그는 훗날 방송에서 어린 시절 재일교포라고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은 적이 있다는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 이옥자 씨는 한국에서 이주했으며, 근래엔 저명한 나전칠기 작가인 길정본 선생의 전문 통역사를 하고 계신다. 손 회장의 어머니는 롯폰기에서 가정부와 둘이서 생활 중이고 손 회장과는 왕래가 적다. 때문에 손 회장과 모친의 사이가 현재는 별로 안 좋은 것 같다는 말도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입버릇은 "너는 천재다" 였다고 한다. 차별에 위축된 아들의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는지 어쨌는진 모르지만, 하도 그런 소리를 듣다 보니 손 회장은 '정말 내가 천재인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훗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사업 제휴를 맺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저는 천재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하도 그러니까 상대방 역시 손정의에게 천재 같은 면이 있어 보이는 인상을 받았다.


여하튼 그렇게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손 회장은 주변인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생각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손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을 벗어나 떠돌며, 사업가가 되는 옥을 찾자). 사실 그가 유학을 결심한 배경도 특이한데, 1973년 쿠루메대 부설고교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그만둔 손 회장은 유학을 결심하지만 막상 가서 뭘 배우면 좋을지 몰라 무작정 도쿄로 상경해 일본 맥도널드 설립자 후지타 덴을 찾아갔는데, "미래에 세계적 CEO가 되려면 뭘 배워야 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후지타는 "인터넷, 노트북"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영감을 얻은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경제학과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며 1980년 경제학 학사를 땄고, 동시에 경제적 독립을 위해 마이크로칩을 활용한 번역기를 만들어 1980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유니손월드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하는 등 본인이 직접 특허를 팔아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



소프트뱅크의 창업과 발전


1981년 일본으로 돌아와 직원 2명과 함께 소프트뱅크를 창업, 소프트웨어 유통, 컴퓨터 서적 출판 등의 소소한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관련 제품 전시회인 "코덱스(COMDEX)"에 출품한 소프트웨어가 대박을 치는데, 이때부터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승승장구하며 파소나의 남부 야스유키, H·I·S의 사와다 히데오와 함께 벤처 삼총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땐, PC계의 천재라고 불린 아스키의 니시 카즈히코와 대비되어 PC계의 신동이라고 불리던 시기도 있었다. 또 80년대에는 니시 카즈히코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고 불렸지만, 90년대 이후에는 이 호칭이 손정의에게 넘어간다.


90년대 들어선 기존 사업에서 더 나아가 공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M&A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다. 투자가는 아니지만 아시아의 워렌 버핏이라 불릴 정도로 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투자한 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야후 : 초창기 투자

알리바바 : 초창기 투자

슈퍼셀 : 2013년 15억 달러에 지분 51% 그리고 2015년 22% 추가 지분 인수 후 2016년 텐센트에 약 73억 달러에 판매했다.


이 외에도 한국 기업인 쿠팡 등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 기업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는 중이며, 향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꼭 필요한 기업은 조금 무리를 하고서라도 인수하는 편이다. 그중 성공적 인수는 바로 2006년 이뤄진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전신인 보다폰 재팬이며, 현재는 더 큰 미국 모바일 시장 석권을 위해 업계 3위인 스프린트 코퍼레이션을 인수하여 열심히 달리는 중이다. 다만 T-모바일과의 인수합병이 틀어지고 실적이 나빠지는 등 2010년대 기준으론 고전 중이다. 이게 다 언락 때문이다. 소뱅과 스프린트는 언락을 안 해주기로 유명하다. 


1990년대~2천 년대 초반 IT버블 때는 자산이 100억 달러를 훌쩍 넘으며 일본 최고 갑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나 버블 붕괴 후 11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후에 19억 달러로 다시 늘어났다. 붕괴 당시엔 시가총액의 90% 이상이 증발한 셈인데 그래도 부자인 게 함정 이때 언론에선 그를 손가락질하며 경영능력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지만, 이러한 언론의 혹평을 이겨내고 과감한 투자와 사업 센스로 다시 기업을 일으켜 세운다. 당시 손 회장은 몸을 피하기보단 주주를 회사로 불러 설득 작업에 나섰는데, 한 거물 투자가가 손 회장의 설명을 듣고 "내 돈을 되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당신은 믿을 수 있겠다"라며 돌아간 일화는 나름 유명하다. 


2010년 6월 15일, 소프트뱅크 30주년을 맞는 주주총회에서 "소프트뱅크 향후 30주년 비전 발표회"가 있었다. 손정의의 철학과 소프트뱅크의 역사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 마사요시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발표이기에 관심 있는 위키니트들은 일독을 권한다. 소프트뱅크 향후 30주년 비전 발표 영상, 이후 책으로도 나왔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 터지며 연쇄적으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에서 원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탈 원전 구상을 내놓고 태양광발전 등 자연에너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공익과 부합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손 마사요시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간 나오토 총리가 탈 원전 선언을 하면서 마사요시의 탈 원전 구상도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5월 31일 KT 이석채 회장과 함께 일본 기업 전산 데이터들을 부산 근교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정확히는 김해시 구산동의 KT 연수원. 김해공항 등 교통시설에 주목한 듯하다. 


2011년 9월 15일부터 중앙일보에서 창간 46주년을 기념하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손 마사요시의 삶과 소프트뱅크의 성장기에 대하여 일정기간 연재하였다. 


2014년 기준으로 소프트뱅크의 주식 19.26%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자산가로 알려져 있다. 포브스에서 조사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2014년에는 일본 2위, 전 세계 45위. 그리고 2014년 9월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19일(현지시간)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 돌풍을 일으키며 데뷔하면서 일본 최고 갑부의 자리(약 17조 2천억)에 다시 오르기도 했다. 2000년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과 만난 후 소프트뱅크가 2000만 달러(약 207억 원)를 알리바바에 투자하도록 결정했는데 14년 만에 엄청난 수익을 올린 셈이다. 


2014년에 34억 달러를 들여 드림웍스를 매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고, 대신 레전더리 픽처스에 2억 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참고로 여긴 영화 인터스텔라를 만든 곳이다.



트리비아


소프트뱅크를 창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에 간염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적도 있다. 이때 그는 다독과 함께 아이들의 미소를 보며 병마를 이겨냈는데, 때문에 병을 완치한 이후 그는 사업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들의 미소를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사업의 1순위로 생각하게 되었다.


상술된 투병 도중 읽은 손자병법에서 엄선한 14개 문자에 본인이 직접 창조한 11개 문자를 조합한 25개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사업 전략인 "제곱법칙"이란 게 있다. 어록이 흔히 그렇듯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가 2010년 다음 세대 경영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개교식 특별 강의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그에겐 나름 가치가 있는 문장인 모양이다. 


한 트위터리안이 그의 대머리를 두고 '머리카락의 후퇴가 심각하다"는 드립을 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머리카락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는 비범한 트윗을 올려 약 4만건의 리트윗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도 근데 모발이식으로 온 몸을 뒤덮고도 남을 돈을 가진 부자에게 대머리 드립친 사람의 정체는 뭘까 참고로 손 마사요시는 자신의 트위터 어카운트에 자사에 대한 소식들, 소프트뱅크와 관련된 여러 트윗들에 대한 리트윗들, 그리고 명대사급이거나 상당히 비범한 트윗들을 자주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올린다. 트윗이 올라갈 때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건 물론, 일본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무려 250만이 넘는 팔로워들이 있다. 만화 "정의는 나의 것"의 등장인물 스미코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스미코는 "내가 존경할만한 사람은 손마사요시 뿐이야".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인 사카모토 료마빠로 알려져 있다. 발표회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의 피해복구를 위해 일본 적십자사에 100억 엔을 기부했다. 일본 적십자사가 모은 지진 구호기금이 700억 엔 정도라고 하는데 손 마사요시 혼자서 1/7을 책임진 셈이다. 그리고 상술했듯 손 회장은 이후 탈원전을 기치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2011년 일본의 모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한 일본 연예인, 유명인 중 총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 조사에서 15.8%의 지지를 받아 2위로 뽑히기도 했다. 1위는 18%를 받은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 기타노 타케시. 2016년 블룸버그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Most Influential) 50인" 명단에서 25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


어릴 땐 한동안 재일교포로서 받은 차별 때문에 이름도 일본식으로 쓰며 꽁꽁 숨어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콤플렉스를 더더욱 키울 뿐이었단 걸 깨닫고, 아버지가 입원하시고 본격적으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미국 유학을 가기 전 할머니에게 아버지 고향에 한번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고, 10대였던 1972년 가을 할머니와 함께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당시 손 회장은 자신이 사업가가 된 계기와 시골이었던 당시 부친 고향의 기억을 2010년 6월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 발표회"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손 회장은 1974년 자신의 성을 "야스모토"(安本)에서 "손"(孫)으로 바꿨다. 미국 유학 시절 어학원과 UC버클리를 같이 다닌 2살 연상의 오노 마사미 씨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역시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사업을 하긴 여러 애로 사항이 많았고, 결국 1990년엔 일본으로 귀화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손씨가 없다는 이유로 귀화를 받아주지 않자, 아내를 손씨로 바꾸는 편법을 써서 손씨 성을 지키며 귀화했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론 일본도 결혼 후 부인이 남편 성을 따르는 서구식 사고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은 성을 새로 만드는 게 가능하기에, 아내를 손씨로 바꾸는 방법을 실행할 수 있었다. 고로 이후부턴 한국계 일본인이 되었다. 


아무래도 재일교포 출신 중 제일 대성한 사람이다 보니 자연히 한국말을 잘 하느냐 또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상대방이 말하면 어느 정도 알아는 듣는다고. 어릴 적엔 재일교포로서 당한 차별 때문인지 본인 스스로도 한국 출신에 대한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술한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국을 미워하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며, 그가 성씨를 한국 성인 "손"으로 한건 할아버지,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업가가 된 이후에도 한국에 종종 내한했는데,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엔 김대중 대통령을 빌 게이츠와 함께 예방해, "나라 망하게 생겼는데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 없겠느냐?"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물음에 초고속 인터넷과 브로드밴드의 중요성을 말해줬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 인터넷 망 구축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1년 1월 카라 해체설과 관련해서 트위터에 카라가 좋다. 카라의 해체를 반대한다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카라는 소프트뱅크의 경쟁회사 au의 모델. 이에 대해 손정의는 "그런 작은 거에 신경 쓸 필요 없다."라는 답변을 남겼다. 


2011년부터 몇 년째 대구 동구청장과 공무원들이 무료로 손 회장의 조상묘를 벌초해주고 있다. 구청은 손정의의 고향이 대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벌초해주니 어쩌니 하는 소릴 했는데, 주변에서는 딱 봐도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연장선상인지 2010년에는 초청장도 보내보고, 2012년에는 벌초 장면을 촬영한 DVD까지 선물로 보냈지만 아무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때 한국 모 언론에서 아이폰은 원래 손 회장의 아이디어였다는 기사를 내서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는데,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사의 경우 단순한 대화 내용을 전한 것인 데다가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건 감안해야 하고 기사의 대화 내용을 보면 스티브 잡스도 "외부에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은 마사(손 마사요시)가 처음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지금 여러 방면으로 생각 중이다."라고 했다고 하니 이미 애플도 내부에선 그런 식의 아이디어가 나와 있었다는 게 된다.


게다가 아이폰 발표에선 iPhone OS 개발에만 수년을 투자했다고 하니 사실 손정의가 아이폰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낚이지 말자. 다만 이미 내부에서 개발 중이었다 쳐도, 손정의 같은 거물이 개발 초창기에 잡스에게 요청했다면 잡스나 애플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역량을 쏟아부어 이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사결정을 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2010년대에도 본인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관련해서 한국에 내한해 이재용 등 여러 기업가, 정치인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쿠팡 등 한국 신생기업에 대한 투자와 대기업들과의 제휴도 활발하다.



야구


야구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크다. 그 덕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일본 프로야구의 큰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자랑한다. 과거엔 2003년 월드 시리즈에서 플로리다 말린스를 우승으로 이끌고, 다승왕 논란 많은 다승왕이지만 넘어가자 1회와 올스타 경력까지 가졌던 브래드 페니를 영입하여 야구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있다. 


참고로 비싼 돈을 주고 외국인 선수를 데려왔는데 성적이 시원찮으면 계약기간 연봉 보장을 하더라도 방출 크리를 시전하는 건 기본이다. 이범호의 경우에도 3년 계약이었는데 1년 부진하자 방출시켰는데 잔여 연봉은 모두 챙겨줬다고 한다. 선수 입장에선 보살이 따로 없다 여담으로 이범호의 고향은 대구이며, 손회장의 본적도 대구로 같다. 


그리고 이런 그의 기대에 보답하듯 2011년 11월 20일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우승했다. 회장님이 맥주를 온몸으로 받아낸 것은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 그리고 2014년과 2015년 일본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한때 현대 유니콘스의 매각 당시 카더라로 현대 유니콘스가 농협-STX-KT에게 모두 매각을 거절당한 이후 손정의 회장과 접촉한 적도 있으나, 당시 기업 매각 건으로 손 회장이 정신이 없었던지라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만약 성사됐다면 소프트뱅크 유니콘스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혹시나 사실이었다면 롯데에 이어 한일 양국 프로야구 스포츠 구단을 가진 기업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나무위키 출처